준비되어 드려지는 삶(고후9:1-6)
리빙스턴이 봉사하는 아프리카에 동료들이 사람들을 보내기위해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답장이 왔습니다. "이곳까지 오는데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의미
없네. 나는 길이 없어도 오겠다는 사람을 원한다네." 주님을 어떻게 따라야 할까요?
1. 인본주의 삶
고린도 교회는 지난날 바울로부터 예루살렘교회가 가뭄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제헌금을 드릴 것을 약속을 했고 이같은 일을 마게도냐
교회에 자랑을 했을 때 마게도냐 교회도 은혜를 받아 자신들의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약속만 했지 시간이 많이 지나도 드리지 않아서 바울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때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방문하자 성도들이 그를 기쁨으로 맞이했고 지금 예루살렘 교회가
가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격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러면
우리가 예루살렘교회에 연보를 하겠다 했지만 그들은 인본주가 앞서는
사람들이었기에 바울은 적선이 아닌 사랑하는 마음에서 준비된 헌금을 드리기를
원하는 마음에 교회에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바울은 헌금의 준비성을 강조하고,
신앙이 성숙하여 형제 사랑 하는 법을 가지기를 가지며 인본주의 삶을 내려놓고
신본주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2. 신본주의 삶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는 신본주의의 삶을 살며 늘
준비된 예배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은혜를 감사하다면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 즉 신본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가지고서는 절대 신본주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모세의 신을 벗으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본주의 삶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엘리사를 부르실 때
왕상 19:19을 보면 엘리사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24마리의 소입니다. 엘리사는 많은 농사를 짓고 있는 부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농경지와 부귀와 영화를 내려놓고 엘리야를 따라 나섯고 베드로도
배와 그물과 전토를 버리고 따랐습니다. 사도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지난날
자신의 자랑이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본주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헌신의 삶
고린도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했다면 인본주의 삶이 아닌
하나님을 들어내는 신본주의 삶을 살았어야 했습니다. 이들에게 진정한 헌신의 삶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10:42
절에서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나타내려고 하는 삶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까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며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고린도
교회와 같이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찬송도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입술의 찬양이 아닌 마음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고 주님께 드리는 예물도
미리 준비하여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준비된
예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예배자의 헌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