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을 무릅써야 진보가 있다. (중앙일보)
2004년 4월 일본이다.
이라크에서 자원봉사와 취재 활동을 하던 일본인 세 명이 저항세력에 억류되자 열도가 들끓었다. “누가 사지(死地)에 가라고 시켰느냐”는 비난이 동정을 압도했다. 가족들에게 “자업자득” “죽어 버려라”라는 저주의 편지와 전화가 빗발쳤다. 우익 언론들은 “정부와 국민에게 폐를 끼친 데 사과하라”고 다그쳤다. 정부도 “구출하는 데 든 비용을 인질들에게 청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범국가적 ‘이지메’ 속에 귀국한 인질들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고, 가족들도 재회의 포옹 대신 “심려 끼쳐 죄송하다”고 머리 숙였다.
두 달 뒤 김선일씨가 피랍됐을 때 한국 사회의 반응은 달랐다. 온 국민이 걱정하고 안타까워했다. 진심으로 무사하길 바랐다. 정부도 석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가 차가운 시신이 돼 돌아왔을 때 온 국민이 슬퍼하고 분노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한국인 청년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 자원봉사 갔다가 탈레반에 납치됐다. 한국 사회의 반응은 전 같지 않았다. 얼음처럼 싸늘했다. 적대적 냉소가 복더위에 소름을 돋웠다. “위험 경고도 무시하고 간 사람들을 왜 혈세로 데려오나” 하는 격한 비난이 메아리쳤다. 아프가니스탄 군경이 한국인 구출 작전을 한다는 소식에 “인질 목숨은 상관 말고 작전에 임하라”는 주문도 있었다. 왜 이리 달라진 걸까. 인질을 보는 시각도 성장 단계에 따라 달라 한 발 앞선 일본을 뒤따라가는 건가. 워낙 사건 사고가 많다 보니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을 보면 짜증이 먼저 나는 ‘현안피로증후군’이라도 생긴 건가.
그보다 종교가 끼어든 탓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너희 하나님에게 구원해 달라고 해라” “신도들을 사지로 몰고 간 목사는 자폭하라”는 비아냥과 극언들이 춤추는 걸 봐도 그렇다. 극성맞은 ‘예수쟁이’들이 남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제국주의적 포교’ ‘막무가내 식 선교’를 일삼는 데 대한 거부감이 우리 사회에 그만큼 가득 찼던 거다. 거기에 약간의 반미(反美) 감정이 조미료처럼 가미된다. 미국에 박해받는 무슬림은 약자고, 불쌍한 그들이 사는 이슬람 국가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다 그 꼴이 됐으니 고소하다는 생각 말이다.
이번 봉사(또는 선교)단의 행동이 신중치 못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세계 평화적 대의를 위해 땀 흘리고 있는 동의 다산부대원들에게 누가 되고 승자 독식의 국제사회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는 정부를 곤란하게 한 것도 맞다. 준비가 철저하지 못한 단기 봉사는 효과가 적고 외려 현지인들과 동고동락하는 장기 봉사자들의 활동을 방해할 있다는 우려도 분명 일리가 있다. 해외 선교사 수 세계 2위인 대한민국 개신교의 ‘실적주의’가 지나치다는 것도 공감하는 바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경솔하고 무모하긴 했어도 고통받는 이웃을 돕겠다는 젊은 열정을, 이교도는 무조건 개종시킨다는 광신으로 몰아붙이는 건 잘못된 일이다. 광신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민간인 납치와 살해도 서슴지 않는 탈레반의 몫이다. 그런 탈레반과 온건파 정부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지만 지원의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도움을 주러 떠나는 것이고, 종교의 힘이 있기에 좀 더 쉽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 인질들을 나무랄 때 콜린 파월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 없으면 사회는 진보하지 않는다”고 위로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인질들이 구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일본”을 꼬집으며 “젊은이들의 순수함과 무모함이 오히려 국제적으로 썩 좋지 않은 일본의 이미지를 고양시켰다”고 말했다. 산이 있어 산에 오르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어 도와주러 가는 것이다. 험한 산에서 조난당한 등반가가 구조대를 힘들게 했다고 비난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것이 개신교건 이슬람이건 신의 섭리다.
[중앙일보7.24 30면] 이훈범 논설위원